지수에게 결혼은 '우리가 함께 고른 색들로 도화지를 채우는 일'이었다. 하지만 식장 계약서를 흔들며 웃는 민석의 얼굴을 본 순간, 지수는 자신의 손에 들린 붓이 꺾여버린 기분을 느꼈다.
"지수야, 여기 진짜 어렵게 예약했어. 네가 바쁘니까 내가 발품 좀 팔았지. 잘했지?"
민석은 아이처럼 칭찬을 기다리는 표정이었다. 지수의 머릿속엔 자신이 꿈꿨던 높은 층고의 홀이나 은은한 조명 대신, 민석이 결정한 '가성비 좋은 지하 홀'의 차가운 바닥이 먼저 그려졌다. 지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랑 한마디 상의도 없이...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에이, 너 편하라고 한 거지. 나중에 가보면 너도 좋아할 거야. 다 똑같아, 식장은."
'다 똑같다'는 말. 그 말은 지수의 취향과 고민, 그리고 결혼에 대한 설렘을 단숨에 '무의미한 소음'으로 만들어버렸다.
스튜디오 결정도 마찬가지였다. 지수는 햇살이 부서지는 자연광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찍고 싶어 몇 날 며칠을 검색했다. 하지만 민석이 내민 건 '패키지 할인 1순위' 업체의 예약 확인서였다.
"사진은 남는 것도 아냐. 나중에 장롱에 처박아둘 건데 뭐 하러 비싼 돈을 써? 내가 제일 저렴하고 합리적인 곳으로 예약 끝냈어. 넌 몸만 와."
그날 밤, 지수는 어두운 방안에서 홀로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의 자신은 민석이 짜놓은 정교한 스케줄표 위를 걷는 태엽 인형 같았다. 민석은 늘 '너를 위해서'라고 말했지만, 그 문장의 진짜 의미는 '내가 결정하는 게 너에게도 가장 효율적이다'라는 오만함이었다.
"민석 씨, 나는 당신 인생의 조연이 되려고 결혼하는 게 아니야."
다음 날, 지수는 처음으로 민석의 말을 끊고 차갑게 말했다. 민석은 당황한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왜 그래? 내가 다 알아서 해주니까 편하잖아. 다른 여자들은 남편이 안 도와줘서 난리라는데." "아니, 당신은 돕는 게 아니라 나를 지우고 있어. 우리가 같이 걸어갈 길인데, 왜 당신이 먼저 뛰어가서 여기로 오라고 명령해? 이건 같이 하는 결혼이 아니라, 당신의 완벽한 계획에 나를 끼워 맞추는 거잖아."
민석의 추진력은 이제 든든한 방패가 아니라, 지수의 숨통을 조이는 창끝이 되어 있었다. 지수는 책상 위에 놓인, 한 번도 펼쳐보지 못한 웨딩 잡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만약 오늘 내가 이 식장을 받아들인다면, 앞으로 태어날 아이의 이름도, 우리가 살 집의 가구도, 심지어 내 노후의 모습까지도 나는 그저 통보받게 되지 않을까?'
지수는 비로소 깨달았다. 사랑은 대신 해주는 것이 아니라, 느리고 서툴더라도 함께 발을 맞추는 일이라는 것을. 지수는 민석이 건넨 예약 확인서를 테이블 위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민석이 정해주지 않은 방향으로, 자신의 발을 내디딜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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