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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짧은 글

기울어진 저울

by 감성좋아 2026. 1. 1.

재우의 눈동자에는 언제나 지수만 담겨 있었다. 식당에서 냅킨을 챙겨줄 때도, 길을 걷다 차가 오면 조심스레 어깨를 감쌀 때도 그의 눈은 ‘사랑해’라는 말을 소리 없이 내뱉고 있었다. 사귄 지 이제 겨우 50일. 재우는 이미 지수와 함께할 먼 미래를 꿈꾸는 듯했다.

“지수야, 다음 달에 우리 바다 보러 갈까? 네가 좋아하는 조개구이 맛집 알아놨어.”

해맑게 웃으며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는 재우를 보며 지수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재우의 열정은 100도씨의 펄펄 끓는 물 같았지만, 지수의 마음은 미지근한 물조차 되지 못한 채 정체되어 있었다.

지수는 문득 두렵다. 재우가 쏟아붓는 사랑의 양만큼, 자신도 그만큼의 사랑을 반납해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이 목을 조여왔다. 그가 다정하게 손을 잡을 때마다 지수는 설렘 대신 ‘내가 이 손을 잡아도 되는 걸까’ 하는 죄책감을 느꼈다. 그의 마음이 커질수록 지수의 마음속엔 미안함이라는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나는 왜 그만큼 좋아지지 않을까.’

어느 날 밤, 지수는 재우가 보낸 긴 장문의 카톡을 읽다 결국 눈물을 흘렸다. "너를 만난 게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야"라는 고백이 지수에게는 응원이나 기쁨이 아닌,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짐으로 다가왔다. 나를 이토록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나는 기껏해야 '노력해보는 중'이라는 사실이 스스로를 너무 나쁜 사람으로 만들었다.

지수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재우의 사랑을 받아 먹으며 예뻐지고 행복해야 할 얼굴인데, 오히려 시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상대의 꽉 찬 진심을 볼 때마다 자신의 텅 빈 공간이 너무 선명하게 느껴져서, 지수는 이제 그만 그에게서 도망치고 싶어졌다.

더 만나보면 좋아질 거라는 기대는 이제 독이 되었다. 50일이라는 시간 동안 지수가 배운 건 사랑이 아니라, 사랑하는 척하는 법이었다. 재우의 순수한 마음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가 더 깊이 빠지기 전에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슬픈 건, 헤어짐을 결심하는 순간 지수가 느낀 감정이 슬픔이 아니라 ‘안도감’이었다는 사실이다.

“미안해, 재우야. 네가 주는 사랑만큼 내 마음이 자라질 않아. 너처럼 좋은 사람한테 나는 너무 모자란 사람인 것 같아.”

지수는 마음속으로 미리 이별을 연습하며, 혼자서만 너무 뜨거웠던 재우의 계절을 이제는 놓아주기로 했다. 사랑을 주지 못하는 죄책감보다, 사랑받는 고통이 더 컸던 50일의 기록이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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