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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짧은 글

환상의 유효기간

by 감성좋아 2026. 1. 1.

85일. 누군가에게는 아직 불꽃이 튈 시기였지만, 수아에게 그 시간은 서서히 안개가 걷히며 민낯이 드러나는 시간이었다.

“야, 쟤 좀 봐. 옷 입은 꼬라지 진짜 안습이다. 관리 좀 하지.”

현우가 낄낄거리며 창밖을 지나는 학생을 가리켰다. 수아는 대답 대신 커피 빨대만 만지작거렸다. 현우는 자신을 향해서는 세상에 없을 사랑꾼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사랑해”, “너밖에 없어”라며 애정 표현을 퍼부었고, 수아는 그 압도적인 사랑에 취해 그와의 연애를 시작했다. 썸 탈 때 밤새 통화하며 나누었던 설레는 대화들, 나를 위해 달려오던 그의 열정은 분명 진심이었다.

하지만 단둘이 있을 때의 ‘사랑꾼’ 현우와, 세상 속의 ‘무례한’ 현우 사이의 간극은 점점 수아를 지치게 했다.

수업 시간, 흐름을 끊고 툭툭 던지는 현우의 철없는 농담에 교실 안에는 차가운 정적이 흘렀다. 친구들은 수아를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봤다. “너 쟤랑 왜 사귀어? 성격 진짜 별로라는데.” 친구들의 조언은 비수가 되어 꽂혔지만, 수아는 그럴 때마다 현우가 보내온 다정한 메시지들을 꺼내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나한테는 잘하니까, 나만은 걔의 좋은 점을 아니까.’

하지만 그 방어막은 오늘 깨졌다.

카페 옆자리 여학생들의 외모를 두고 수준 낮은 품평을 늘어놓는 현우의 입술, 정리되지 않은 지저분한 옷차림, 그리고 타인을 깎아내려야만 겨우 세워지는 그의 가짜 자존감.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오자 수아는 구역질이 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현우야, 우리 썸 탈 때 기억나?”

“그럼! 내가 너 꼬시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왜 갑자기?”

현우가 해맑게 웃으며 손을 잡으려 했다. 그 손은 여전히 따뜻했지만, 수아는 본능적으로 손을 뒤로 감췄다.

“그때의 너는 내가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 근데 지금 내 앞에 있는 너는... 남을 까내리지 않으면 대화가 안 되고, 수업 시간엔 분위기도 못 맞추고, 자기 관리도 전혀 안 하는 사람이야.”

“야,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하는데! 갑자기 왜 이래? 너 진짜 예민하다. 우리 다르다니까?”

현우의 입에서 나온 그놈의 ‘다르다’는 핑계. 수아는 이제 그 말이 ‘난 바뀔 생각이 없으니 네가 참아라’는 뜻임을 안다.

“응, 우린 너무 달라. 나는 상식이 있는 사람이 좋고, 배울 점이 있는 사람이 좋아. 나를 사랑해 주는 네 마음은 고맙지만, 네 인성까지 사랑해 줄 힘은 이제 없어.”

수아는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뒤에서 현우가 무어라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지만, 신기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듯 시원했다. 85일간의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라는 감옥에서 스스로 걸어 나오는 순간이었다.

바깥 공기는 차가웠지만, 그 어느 때보다 상쾌했다. 이제야 비로소 타인의 시선이나 무례함에 함께 얼굴 붉힐 일 없는, 온전한 수아만의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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