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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짧은 글

당신이라는 계절이 내게 머물러서

by 감성좋아 2025. 12. 23.

(남자의 시점)

세상은 늘 무채색이었다. 적어도 그녀가 내 평범한 궤도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출근길, 늘 타던 지하철 4호선의 덜컹거림과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들. 그 틈바구니 속에서 나는 습관적으로 이어폰을 꽂았다. 우연히 흘러나온 선율 하나가 귓가를 간질였다. 아주 평범한 피아노 곡이었지만, 그 음표 위로 불현듯 그녀의 옆모습이 겹쳐졌다.

‘아.’

나도 모르게 나지막한 탄성이 터졌다. 아무 일도 없었다. 슬픈 일도, 특별히 기쁜 일도 없었는데 가슴 정중앙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입꼬리가 멋대로 느슨해졌다. 사람들은 나를 미친 사람처럼 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내 마음속엔 이미 그녀라는 햇살이 환하게 번지고 있었으니까.

회사를 나와 길을 걷다 멈춰 섰다. 오늘따라 바람이 유난히 다정했다. 스치는 바람 끝에 그녀의 샴푸 향기가 묻어 있는 것만 같아 눈을 감았다. 예전엔 이런 감정들이 낯설고 어색해 애써 외면하곤 했다. 누군가에게 마음의 자리를 내어준다는 건, 내 삶의 통제권을 잃는 것 같아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어색함마저 좋아졌다. 하루 종일 그녀라는 부드러운 통제 속에 갇혀 지내는 일. 하늘만 봐도 그녀의 미소가 보이고, 빌딩 숲 사이로 부서지는 노을마저 그녀의 다정함을 닮아 있어 자꾸만 눈시울이 붉어졌다.

"당신 때문이야."

혼잣말이 입술 밖으로 새어 나갔다. 세상이 이토록 반짝거릴 수 있다는 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그녀라는 존재 하나로 인해, 나의 비루했던 일상은 한 편의 서정시가 되었다.

퇴근길,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다시 한번 이유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니, 사실 이유는 명확했다. 내 모든 미소의 종착역에는 항상 그녀가 서 있었다.

오늘 밤, 꿈속에서도 나는 그 미소를 잃지 않을 것이다. 그 미소의 끝에, 그녀가 나를 보며 마주 웃어주길 간절히 바라며.

 

(여자의 시점)

어제는 비가 내렸고, 오늘은 바람이 불었다. 달라진 건 날씨뿐인데, 내 안의 풍경은 온통 당신으로 물들어 제자리를 찾지 못한다.

나는 길을 걷다 멈춰 서서 습관적으로 휴대전화 화면을 켠다. 아무런 연락도, 알림도 없다. 하지만 우연히 들려온 라디오의 노랫말 한 소절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당신이 좋아하던 선율, 당신이 흥얼거리던 낮은 저음. 그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와 내 심장을 흔들어 놓는다.

‘이상하지, 이렇게 가슴이 시린데 왜 입술은 당신을 기억하며 웃고 있을까.’

당신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내 세상은 순식간에 반짝인다. 삭막했던 회색빛 건물들도,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들의 뒷모습도 당신이라는 필터를 거치면 다정한 풍경화가 되었다. 이런 감정이 낯설어서, 누군가를 이토록 깊이 담아내는 내가 무서워서 뒷걸음질 치던 날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어색함마저 나의 일상이 되었다. 하루 종일 당신이라는 예쁜 감옥에 갇혀 지내는 것이 나의 유일한 구원이었다.

창밖의 하늘은 시리도록 푸르다. 저 하늘 어딘가에 당신의 시선도 머물고 있을까. 당신 덕분에 내 세상은 처음으로 빛을 배웠고, 나는 당신 덕분에 매일 이유 없이 웃는 법을 깨달았다.

하지만 나의 미소는 딱 거기까지였다.

길 건너편, 당신과 닮은 누군가의 뒷모습을 쫓다 멈춰 선 횡단보도 앞. 나는 깨닫는다. 내 세상이 이토록 반짝거리는 이유는 당신이 내 곁에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당신을 **'부재'**라는 이름으로 간절히 붙들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내 미소의 끝에 당신이 있길 바랐지만, 정작 당신의 미소 끝에는 내가 없었다.

나는 오늘도 이유 없이 웃어본다. 흐릿해지는 시야 너머로 당신의 환영을 붙잡아보려 억지로 입꼬리를 올린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입술 끝에 닿아 비릿한 맛을 낸다. 당신 때문에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워졌는데, 정작 그 아름다운 세상 속에 당신과 나,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를 웃게 한 것도 당신이었고, 그 미소를 눈물로 번지게 하는 것도 결국 당신이다.

오늘도 나는 당신이라는 찬란한 신기루 속에서, 혼자 웃으며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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